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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편집

경기도 이천

시조편집

서신일(徐神逸)

주요 집성촌편집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면 대북동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일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일원

주요 인물편집

서목, 서필, 서희,서봉,서눌, 서유걸,서유위,서유(주)행,서준방,서준영,원목왕후,서한,서석,서추,서약진,서정,서존,서균,서숭조,서공,서순,서성,서안정,서언,서웅,서익,서린,서청습,서진부,서균한,서효리,서찬,서희팔,서춘,서릉,서적,서박,서직,서준,원묘국사 요세,서윤현,서념,서첨,서영계,서중계,서원계,서돈경,서민경,서원경,서신계,야사불화,서윤,서충,서성윤,서희찬,서후상,서맹원,서온,서인,서욱,서의,서정희,서인한,서홍찬,서인조,서인한,서문한,서천량,서수,서구방,서효손,서진,서기준,서영,서중보,서보,서희준,서광준,서식,서신,서견,서원,서운,서인비,서문보,서유,서진,서선, 서호,서효리,서효주,서효환,서효당,서즐,서강,서경생, 서기,서림,서윤련,서지,서우,서연,서경충,서인원,서예원,서경춘,서득천,서사원,서사적,서홍도,서응두,서응시,서대근,서경붕,서우신,서희신,서춘무,서일남,서진걸,서승춘,서련,서봉령,서달증,서숭로,서문보,서국장,서국빈,서국정,서한중,서경창,서흔남,서태금,서열,서천일,축원,치익,자흔,서인주,서병학,서봉관,서일,서상용,서두수,서승태,서기환,서민호,서왈보,서종채,서상렬,서광조,서태석,서성우,서진수,서성달,서성길,서우순,서상록,서정범,서종식,서정수,서연식,서희환,서남표,서향순,서남동,서경수,서석조,서성환,서준산,서홍송,서경보,서재응,서영택,서영훈,서용희,서기호,서향희,서용택,서기원,서인석,서혜정,서봉연,서준호,서윤복,서장훈,서인영,서현,서희경,서규용,서남수,서생현,서진규,서정원,서현진,서지혜,서형정,서정민,서상섭,서한샘,서갑수,서종석,서태선,서정선,서혜숙,서만술,서송숙,서수민,서영배,서경배,서영필,서준혁,서혜경,서관모,서교일,서거석,서재홍,서영수,서강수,서유석,서원석,서한옥,서재석,서의열,서영환,서민환,서재관,서혜석,서진환,서경환,서재원,서종화,서균렬,서활,서순팔,서경원,토시가와,대니서,서진형,서병길,서병인,서정욱,서철,서윤석,서관희,서동명,서윤제,서한규,서은광, 서재응, 서건창, 서주현, 서희승, 서재경,서정희, 서갑숙, 서미경, 서향희, 서정민, 서삼석, 서인석, 서혜경, 서효원,서효명, 서효림, 서지석, 서수남, 서민정, 서영희, 서영은, 서태화, 서영은, 서태화, 서지영, 서우림, 서신애

인구(2000년)편집

172,072명 (45위)

서씨(徐氏) 분파편집

이천 서씨(利川 徐氏)는 서씨 중 대종 종가이며, 대구 서씨,달성 서씨,연산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장성 서씨,전주서씨,부여 서씨 등은 이천 서씨의 별파이다. 서씨(徐氏)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 이다. 통일신라시대 아간대부를 지내시고 이천(利川)으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어느 날 화살을 맞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낮에 당신이 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때 이미 나이 80세가 넘었으나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천 서씨는 서신일,서필,서희, 서눌 서유걸, 서정 서존, 서균 서린, 서원 서공 서성 서순,서숭조,서능, 서신계,서린,서원경,서충,서윤,서신,서호 등 명재상을 배출하여 고려 최고 문벌귀족 집안이 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 서성 후손이 3정승(서종태,서명균,서지수),3대제학(서유신,서영보,서기순)을 6대 연속 배출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서씨 시조 서한(徐閑)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 서씨에서 분파하여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는 달성 서씨 즉 고려 후기에 서진,서기준,서영,서균형 등 명재상을 배출한 달성 서씨 집안이 진정한 달성 서씨 경상도 양반 가문이다. 달성 서씨 시제는 한식일(4월5일)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 봉계산에서 거행된다. 21세기에 두 집안은 원래 한 뿌리여서 대구달성 서씨로 모임을 갖고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10월1일에 이천 효양산부발읍 산촌리 산2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姓氏)이다.

서(徐)씨는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달성(達城·대구 포함),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당성(唐城), 평당(平當), 복흥(福興), 의령(宜寧), 남양(南陽), 황산(黃山), 염주(鹽州), 군위(軍威) 등 20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53본, 일제강점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176본으로 기록되어 있다.서씨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고 있는 이천서씨가 종가라고 할 수 있다.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신통(徐神通) 아들 서목(徐穆)(이천백.문하시중)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이섭대천(利涉大川)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이처럼 이천 서씨는 고려 황제국 건국에 협력해 내의령 서필(徐弼 종1품) 평장사 서봉(徐逢 정2품), 내사령 서희(徐熙 종1품), 문하시중 서눌(徐訥 종1품) 좌복야 서유걸(徐惟傑 정2품) 장야서령 서유위(徐惟偉) 달성군 서주행(徐周行),원목왕후,형부상서 서준방(徐俊邦) 연성군 서준영(徐俊英 정3품) 문하시중 봉 희양대군 서수 (徐琇 종1품) 판삼사사 서정(徐靖 종1품) 병부상서 태원군(太源君) 서존(徐存 정3품) 군기소윤 서한(徐閈),좌복야 서균(徐均 정2품) 판대부사 서린(徐嶙 종2품), 좌복야 서진부(徐振扶 정2품),평장사 서성(徐成 정2품) 동지추밀사 서순(徐淳(諄) 종2품) 판삼사사 서공(徐恭 종1품)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고려 최고의 명문 귀족가문이 됐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판관 서원(徐元),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서씨(徐氏) 계보

1세 시조는 신라 아간대부(부총리) 서신일(徐神逸)


2세 문하시중. 호족 서목(徐穆)

내의령(국무총리) 서필(徐弼)


3세 내사령(국무총리) 서희(徐熙)

서염(徐廉)

서영(徐英)

광평시랑 평장사(부총리) 서봉(徐逢)

대장군(차관) 서후(徐厚)


4세 문하시중(국무총리) 서눌(徐訥)

상서좌복야(부총리) 서유걸(徐惟傑)

장야서령(장관) 서유위(徐惟偉)

달성군 서주행(徐周行)

사재승 (차관) 서숭(徐崧)

중랑장 서긍(徐肯)


5세 판삼사사(국무총리) 서정(徐靖)

군기소윤(軍器少尹)(차관보). 서한(徐閈) (판도판서. 정3품.장관급- 대구(大丘)파 중시조)

병부상서(장관) 서존(徐存).연산,부여(扶餘),장성,남양(南陽(당성唐城)서씨 중시조

현종의 왕비 원목황후 서씨 (徐氏)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서시랑도. 서석(徐碩)

위위경지 태사국사(衛尉卿知太使局事)(장관급) 서웅(徐雄)

주부(차관보) 서면(徐冕)

문하시중(門下侍中) 봉 희양대군(국무총리) 서수(徐琇)

성운위관 소감(少監)(차관). 서정(徐程)

서대창(徐大昌) (충신)

서필중(徐必重) (충신)


6세 판대부사(부총리) 서린(徐嶙)

상서우복야(부총리) 서균(徐鈞)

함문통사(국장) 서단(徐亶)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장관) 서청습(徐淸習)

병부시랑(차관) 서장기(徐長己)

교위주부(衛尉注薄) 서경의(徐聲宜)

장작소감(將作少監)(장관) 서화흡(徐化洽)

요나라 축하사절 서조(徐助)

예빈 소경(少卿) 서추(徐諏)

박사(博士) 서선(徐禪)

진봉사(進奉使) 서방(徐昉)

어사대 어사중승(장관) 서염(徐琰)

문림랑수궁서령겸직사관 서안정(徐安貞) (文林郞守宮署令兼直史館-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 참여)

형부상서(장관) 서준방(徐俊邦) (평당(當)파.봉성파 중시조)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부판사 判事(국무총리급) 서신(徐愼)


7세 평장사(부총리) 서원(徐元)(병부상서공파 직계 선조)

현화사 대사 서영관

판삼사사(국무총리) 서공(徐恭)

평장사(부총리) 서성(徐成)

지추밀원사(부총리) 서순(徐淳)

사복부령 서염(徐廉)

좌복야(尙書左僕射)(부총리) 서효리(徐孝理)

예빈시윤(장관) 서찬(徐瓚)

좌복야(부총리) 서진부(徐振扶)

상서 우복야(부총리) 서보(徐甫)

봉성군 서약진(徐若珍)

밀직사(密直司使)(부총리) 서무질(徐無疾)


8세.중추원사(부총리) 서숭조(徐崇祖)

병부상서(장관) 서희량(徐希亮)

판도판서(장관) 서진(徐晉) (달성서파 중시조)

부령(청와대 경호실장.장관) 서익(徐翼) (부령공파 중시조)

감문위 대호군(大護軍)(대장군)(차관) 서찬(徐贊) (향약간이방,목활자-우리나라 최초 활자 제작)

사헌부 집의(차관급) 서연(徐延)

서언(徐彦) (혁명가)

병부시랑(차관급) 서저(徐氐)

판도좌랑 (版圖佐郞) 서평(徐坪)

예빈소경(국장) 서광(徐珖)

내의시랑(차관급) 서희적(徐希積)

좌영낭장(左營郞將) 서준명(徐俊明)

교위(校尉) 서유정(徐惟挺)

서흥조(徐興祖)

도승지(장관) 서령(徐領)

집의(차관급) 서인(徐諲)

성균관 생원 서영보(徐永甫)

상장군(장관급) 서유(徐裕) (무신시대에는 재상급)

상장군(장관급) 서돈경(徐敦敬)


9세. 정당문학(부총리)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현재 군장성급). - 연산서파,부여서파,장성서파 - 중시조)

이부시랑.평장사(부총리) 서희찬(徐希贊)

소감(少監) (장관급) 서황(徐晃)

문하 찬성사(부총리) 서기준(徐奇俊)

상장군(장관) 서균한(徐均漢) (무신시대에는 재상급 )

낭장 서찬(徐贊)

도승지(장관) 서욱(徐勖)

중정대부(차관급) 서선(徐瑄)

만호(차관보급) 서혼(徐琿)

서자민(徐子敏)

장군 서칭(徐偁)

장군 서정(徐挺)

호장 서필중(徐必中)

문림랑위위시주부동정(文林郞衛尉寺主簿同正) 서무(徐茂)

장군 서광순(徐光純)

洪州牧使 감찰어사(차관급) 서의(徐義)

진주부사(晉州副使).좌승지(장관) 서녕(영)(徐寧)

시중랑 (侍中郞) 서문한(徐文漢)

성균관 진사 서문찬(徐文贊)

호장(戶長) 서전금(徐田金)

호장 (戶長) 서순인(徐純仁)

항적(降賊) 서효관(徐孝寬)

낭장 서정(徐靖)

서지(徐趾)


10세.정순대부 판내부사사(장관급) 서춘(徐椿) -부여(扶餘)서파 대종)

문하시중(門下侍中)(국무총리) 서릉(徐稜) ( 장성서파 중시조- 절효공파)

합문사.승지(청와대 비서실장) 서온(徐溫(송나라 아악 전수)

판사재사(부총리) 서효손(徐孝孫)

문하 찬성사(부총리) 서영(徐穎)

동지추밀지사(부총리급) 서신계(徐臣桂)

부여(扶餘)봉례공파 서박(徐樸)

판도판서(장관급) 서적(徐迪) (남양(南陽)서파)

서직(徐稷 연산(連山)서파)

어향사(御香使) 서야사불화(徐埜思不花) (서호(徐昊)

상호군(장관급) 서응려(徐應呂)(몽고 지배 시대에는 장관)

군수 서원계(徐元桂)

檢校舍人검교사인(국장급) 서중계(徐仲桂)

호장(戶長) 서복(徐福)

호장(戶長) 서자번(徐自蕃)

통직랑지서주사(通直郞知瑞州事) 서중린(徐仲麟)

천락사 대사 서요세(徐了世) (원묘국사(圓妙國師)


11세.병부상서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국무총리급) 서린(徐鱗) (무신시대-병부상서공파 중시조)

비서성소감(장관급) 서시의(徐時義)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부총리급) 서성윤(徐成允)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부총리급) 서인한 (徐仁漢)

정당문학(부총리급) 서균형(徐鈞衡)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부총리급) 서익진(徐益進)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부총리) 서념(徐恬) (문한공파 중시조)

대장군(공신)(차관급) 서준(徐俊)

대장군(차관급) 서희(徐曦)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 (연산(連山)파 중시조)

정치도감 좌랑(차관급) 서호(徐浩)

서구방(徐九方) (구월관음도-일본 교토대 보관중. 고려 최고 화가)

낭장 서오(徐敖)

사재감정(장관급) 서진(徐晋)

별가(別駕) 서윤공(徐允公)

호조전서(장관) 서의(徐議)

병부시랑(차관급) 서의(徐誼)

병부시랑(차관급) 서간(徐諫)

생원(生員) 서복례(徐復禮)


12세 문하시중(門下侍中)(국무총리) 서원경(徐元敬)

판내부시사(장관급) 서진(徐璡)

판밀직사(부총리) 서충(徐忠)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부총리) - 서윤(徐玧) (시랑공파 중시조 )

병부령(부총리급) 서수(徐秀)

상장군(장관급) 서민경(徐敏敬) (몽고 지배 시대 )

장령(차관보급) 서 견(徐甄)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 (회덕현(懷德縣) 감무(監務) )

내수(內竪) 서양수(徐良守)

서천길(徐天吉)

서린(徐吝)

사마(司馬) 서관(徐寬)

13세 목사.문하시중(국무총리) 서신(徐信) (목사공파 중시조)

찬성사(贊成事)(부총리)서원(徐遠)

비인현사(庇仁縣事) 서유(徐逾)

추밀원사(樞密院事)(부총리) 서후상(徐後祥)

판내부시사(判內侍府事)(장관급) 서정수(徐貞壽)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司宰監正)(장관급) 서광준(徐光俊).충신)

기거사인(국장급) 서언(徐彦)

요동진무사(遼東鎭撫使) 서현(徐顯)

우승지(장관급)서숙(徐淑)


14세 봉익대부(부총리) 서윤현(徐允顯)(법명은 覺喜)

공조전서(장관) 서보(徐輔) (전서공파 중시조)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서공기(徐公騏)

서규(徐規) (이성림 당인.혁명가)

전공총랑(典工摠郞)(차관보급) 서능준(徐能(陵)俊)

봉정대부(차관보급) 서중보(徐仲輔) (고려의 충신. 두문동 72현(서견,서중보,서보,서광준)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 서운(徐暈)

장군 서금광(徐金光)

상장군(장관급) 서정희(徐廷希)


고려시대 이천 서씨는 14대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최고 명문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이 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서씨(徐氏)는 국무총리급(종1품): 10명, 부총리급(정2품,종2품): 23명,장관급(정3품): 28명 ,차관급(종3품): 12명,차관보(정4품): 5명, 고려장군(상장군,대장군포함.정3품.종3품): 19명,고려명신: 60명, 고려공신: 24명,고려충신: 25명, 고려처사:14명, 고려국사: 1명, 고려대사: 2명,고려 호장: 5명, 고려 음악가: 1명, 고려 화가: 1명, 고려 대학자: 5명이다.



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 사재감 서인비(徐仁庇 정3품),개국원종공신 사재령 서원기(徐元奇 정3품), 태종 때 익대좌명공신 예조판서 서유(徐愈 정2품), 사재감정 서진(徐晉 정3품), 남원부사 서호(徐顥(灝 정3품), 세종 때 우군도총체(右軍都摠制) 서선(徐選 종1품),목사 서경흥(徐敬興 정3품),사헌부 장령 서근(徐赾), 단종 때 암행어사 서호(徐皞), 사롱사 형제 (단종 충절) 종묘서령 서효리(徐孝理) 무공랑별제 서효주(徐孝宙) 예빈사정 서효환(徐孝寰) 전생서판관 서효당(徐孝堂),우승지 서혼(徐混 정3품),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한 서강(徐崗 정2품), 예종 때 익대공신 서경생(徐敬生), 중종 때 반정(反正)에 참여 이조판서에 오른 서지(徐祉 정2품),충순위병절교위 서우(徐祐),장령 서산보(徐山甫),참봉 서학종(徐鶴踵),참봉 서연(徐演), 성균관 전적 서희려(徐希呂), 선조 때의 학자 서기(徐起),임진왜란 때 좌부장으로 함흥ㆍ홍원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서득천(徐得天)과 서사원(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私財(사재)를 털어 武器(무기)와 식량을 구입하여 義兵(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고,호조참의 선무원종일등공신 서사적(徐思迪),의병장 서대근(徐大謹),서홍도(徐弘渡),서진걸(徐晋傑),서승춘(徐承春),서적(徐迪),서의(徐誼),서희복(徐希福),서희우(徐希祐),서희례(徐希禮),서영우(徐永佑),서사도(徐思道),서정원(徐廷原),서영상(徐永祥),서약(徐鑰),서응후(徐應厚),서덕숭(徐德崇),서천동(徐千童),서계철(徐繼哲),서인손(徐仁孫),서연후(徐延厚), 수군첨절제사 서덕룡(徐德龍),병조좌랑(兵曹佐郞) 서경춘(徐景春),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 충민공(忠敏公)의 시호를 받은 서춘무(徐春武),서응두(徐應斗)는 의병장으로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나갔는데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조헌(趙憲)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戰鬪)에서 칠백의사((七魄義士)와 함께 순절(殉節)한 서응시(徐應時)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서정후(徐廷厚)와 서진문(徐振文)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 들어가 큰 활약을 하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선무원종 1등 공신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행차하였던 서경붕(徐慶鵬), 정묘호란 때 의병장 서일남(徐馹男), 병자호란 때 의병장 서국장(徐國章),서흔남(徐欣男),서언길(徐彦吉),이조좌랑 서국정(徐國楨),성균관 전적 서국빈(徐國濱), 공조참판 서국평(徐國平 종2품), 절제사 서국보(徐國寶 종2품), 제주판관 서련(徐憐),조선 학자 서경덕(徐敬德),서봉령(徐鳳翎),서달증(徐達曾),서의중(徐義中),서경창(徐慶昌),서영환(徐永煥),서한주(徐漢柱),서일원(徐一元),서걸(徐傑),서종하(徐宗夏),서자통(徐自通),서응문(徐應文),서억만(徐億萬),서문숙(徐文淑),서원지(徐元之),서태원(徐兌元),서복기(徐復基),서몽희(徐夢曦),서상덕(徐尙德),서상남(徐尙男),서우량(徐友諒),서응회(徐應會),서자적(徐自適),서태수(徐台壽),서한남(徐漢男),서천일(徐千鎰),서할(徐劼),서승우(徐承佑),서만조(徐萬組),서효원(徐孝源),서문숙(徐文淑),서석린(徐錫麟),서우흠(徐于欽),서상렬(徐相烈),서강수(徐江水), 위항시인 서병옥(徐秉玉),서병수(徐秉수),서의석(徐義錫), 조선 화가 서문보(徐文寶), 조선음악가 서창서(徐昌瑞), 조선 효자 서즐(徐騭),서채량(徐采亮),서병홍(徐柄泓),서준여(徐俊汝),서태금(徐太金),서영측(徐永側),서영팔(徐永八),서봉주(徐鳳周),서덕길(徐德吉),서만(徐萬),서재대(徐再大),서언유(徐彦儒),서윤옥(徐崙玉),조선 혁명가 서림(徐林) 서윤련(徐閏連) 서양갑(徐羊甲),병조참판 서숭로(徐崇老 종2품),공조참의 서봉록(徐奉祿 정3품),부총관 서보우(徐補禹 종2품),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서홍련(徐鴻連),도호부사 서확(徐臒 정3품),도호부사 서일명(徐一明 정3품),군자감정 서의건(徐義健 정3품),군자감정 서효행(徐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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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종(徐貴宗),진사 서윤충(徐允忠),교수 서윤경(徐允敬),참봉 서윤신(徐允信),사마 서유령(徐有齡),호조참판 서필하(徐必夏 종2품),좌승지 서선최(徐善最 정3품),첨지 서필우(徐必遇),이조참판 서재해(徐載海 종2품),군자감정 서수진(徐粹珍 정3품),통정대부 서채영(徐采榮 정3품),통정대부 서창유(徐昌儒 정3품),사헌부 지평 서복유(徐復儒),좌승지 서기원(徐基元 정3품),가선대부 서갑기(徐甲基 종2품),중추원의관 서종성(徐鍾聲),유학자 서명종(徐明鐘),고승(대사) ,축원,치익,자흔이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국무총리급(정1품): 0명, 부총리급(종1품): 2명,장관급(정2품): 12명 ,차관급(종2품): 50명,차관보(정3품 당상관): 165명, 조선 명신: 30명, 조선 공신: 10명,조선 충신: 15명, 조선 처사: 20명, 조선 화가: 1명, 조선 음악가: 1명, 조선 시인: 3명, 조선대사(고승):3명,조선 학자: 48명, 조선 의병장: 35명이다.

동학의 지도자 서장옥(徐璋玉),서병학(徐丙鶴), 청산리전투 승리 총재 서일(徐一), 일제강점기 의병장 서상국(徐相國), 독립운동가 서종채(徐鍾採),서태석(徐邰晳),서광조(徐光朝),서상렬(徐相烈),서왈보(徐曰甫),서승태(徐承台),서기환(徐基煥),서영환(徐永煥),서봉화(徐鳳化),서기창(徐基彰),서성모(徐成模),서병하(徐炳河),서병하(徐丙夏),서달수(徐達洙),서동일(徐東日),서윤제(徐允濟),서상용(徐相庸),서학이(徐學伊),서병철(徐丙轍),서상봉(徐相鳳),서의배(徐義培),서영석(徐永錫),서원준(徐元俊),서성학(徐成學),서필환(徐必桓),서성군(徐成君),서운선(徐云先),서영백(徐英伯),서춘만(徐春萬),서광도(徐光道),서여선(徐汝善),서상기(徐相基),서쇄용(徐鎖用),서정만(徐貞萬),서태식(徐泰植),서병두(徐丙斗),서몽조(徐夢祚),서상업(徐相業),서화일(徐化壹),서승렬(徐承烈),서성윤(徐成允),서진령徐鎭(水令), 서청산(徐靑山), 서초(徐超), 서병선(徐秉善),서순채(徐淳彩),서삼진(徐三辰),서장주(徐璋珠),서병순(徐秉舜),서병수(徐丙需),서상호(徐尙虎),서세충(徐世忠),서점수(徐點守),서정규(徐正奎),서장관(徐壯寬),서병림(徐丙林),서영해(徐嶺海),서진구(徐鎭九),서재익(徐在益),서대순(徐大順),서상경(徐相庚),서경식(徐璟植),서단파(徐檀坡),서상오(徐相午),서동익(徐東翼),서동화(徐東和),서상우(徐相祐),서정오(徐廷五),서영달(徐迎達),서봉원(徐鳳元),서정렬(徐正烈),서삼종(徐三鍾),서석근(徐石根),서정기(徐正基),서기옥(徐琦玉),서재수(徐在守),서경태(徐敬兌),서성국(徐成局),서호순(徐鎬淳),서봉운(徐奉雲),서재록(徐在祿),서동식(徐東植),서용석(徐龍錫),서재옥(徐在玉),서순옥(徐順玉),서성근(徐成根),서병규(徐丙珪),서재석(徐載錫),서인환(徐仁煥),서은구(徐殷九),서기예(徐基澧),서병돈(徐丙敦),서영백(徐英伯),서완득(徐完得),서상린(徐相燐),서대순(徐大順),서창석(徐倉錫),서옥봉(徐玉奉),서응삼(徐應三),서재만(徐在萬),서몽조(徐夢祚),서인국(徐寅國),서우범(徐禹?),서민석(徐岷晳),서벽환(徐壁煥),서원태(徐元泰),서석주(徐錫柱),서성칠(徐星七),서순봉(徐淳鳳),서영완(徐永琬),서광진(徐洸璡),서인필(徐仁弼),서정량(徐廷亮),서병선(徐炳善),서우석(徐禹錫),서상석(徐象錫),서홍구(徐洪勾),서용하(徐用河),서영석(徐永錫),서형묵(徐亨默),서광주(徐光周),서달제(徐達悌),서재영(徐在英),서복손(徐福孫),서진(徐震),서상원(徐相沅),서하원(徐河源),서순석(徐舜錫),서병수(徐丙需),서낙서(徐洛西),서금룡(徐今龍),서정후(徐廷侯),서유준(徐有俊),서창림(徐昌林),서기풍(徐基?),서성근(徐成根),서응만(徐應萬),서창무(徐昌務),서흥석(徐興錫),서두성(徐斗星),서재윤(徐載閏),서삼식(徐三植),서학종(徐學鍾),서재순(徐在順),서신영(徐信榮),서동수(徐東洙),서난수(徐蘭洙),서응삼(徐應三),서재호(徐在皓),사진선구자 서순삼 (徐淳三),육탄 10용사 소위 서부덕,국회부의장 서민호(徐珉濠), 국회의원 서성달,서한샘, 서재관,서혜석, 서경원,서상섭, 서기호, 이천그룹 회장 서상록(徐相錄), 태평양그룹 회장 서성환(徐成煥),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서경배(徐慶培),재현산업 회장 서유석, 성원제강 회장 서원석, 세진무역 회장 서한옥, 서안개발 회장 서의열, 성균관대총장 서성우, 복천학원설립자 서우순, 숭문중고교설립자 서기원, 봉선학원부천여상고교설립자 서성길, 고원진선중학교설립자 서덕구, 서울식품공업회장 서준산, 조해산업회장 서준호,대한이화학사장 서정구,한국기술투자회장 서갑수, 국무총리 서영훈 , 총무처장관 서석순, 건설부장관 서영택 ,과기부장관 서정욱 ,농림부장관 서규용 ,한국은행 총재 서진수, 교육부장관 서남수 , 교육부차관 서범석, 건설부차관 서종대,국가정보원기획실장 서동만, 용인시장 서정석,서울시정연구원장 서준호, 세계불교법왕 서경보, 전 조계종총무원원장 서의현,카이스트 총장 서남표, 조선대총장 서재홍,한글학자 서정범, 서정수, 불교학자 서경수, 핵학자 서균렬, 의학자 서병설, 서활,서순팔, 신학자 서남동, 서예가 서희환,서태종 금감원 부원장,서근우 신용보증기금이사장, 서재경 서울신용보증재단이사장, 서기동 구례군수,서삼석 무안군수, 서종화 서울시의원, 피아니스트 서혜경, 발레리나 서희,가수 서현,서인영,배우 서인석, 서지혜,서현선 ,서희승, 서재경, 운동선수 서윤복, 서정원, 서향순,서재응,서장훈,서희경, 서윤택 육군소장,서경석 육군소장,서길원 육군중장,서상국 육군소장,서정열 육군소장,서욱 육군중장,연평해전 중사 서후원,하사 서정우, 천안함 하사 서승원,하사 서대호,서해길 충남대교수, 서정일 경희대교수, 서봉연 서울대교수, 서연호 한양대교수, 서태영 부산대교수, 서두환에너지연구소물리실장,서두옥 제주대교수,서남규,서진헌 텍사스공대교수, 서광벽 공학박사, 서종범 경북대교육대학원장, 서인석 순천대교수, 서경림 제주대교수, 서광민 강원대교수,서정규 계명대교수, 서수지 계명대교수, 서원벽 의학박사, 서성인 한양대교수, 서성봉 경북대교수, 서기옥 의학박사, 서성훈 경희대교수, 서성무 중앙대교수, 서운택 대구대교수, 서익환 한양대교수, 서해호 원광대교수, 서정기 광주교대교수, 서원호 대전실업전문대교수, 서태상 동국대경주분교교수, 서봉호 항공대교수, 서재현 목포대교수, 서창호 공주대교수, 서주노 해군사관학교교수, 서영환 창원대교수, 서진환 성공회대 교수,서용택 인창중고교교장, 서한제 순천금당고등학교교장, 서병재 광양다압다사중학교교장, 서강희 전주남중학교교장, 서동훈 소설가, 서혜정 음악박사, 서영종 서예가, 서원규 내과의원장, 서홍준 소아과의원장, 서정열 신경외과의원장, 서용하 서용하의원장, 서정진 삼선의원원장, 서창용 자선의원원장, 서근호 동부시립병원안과과장, 서창선 성제의원장, 서재선 삼원의원장, 서강석 천혜의원장, 서정성 안과원장, 서민환 환경부 부장,서경환 고등법원부장판사, 서향희 변호사, 서성환 변호사, 서영수 대전지검검사,서병조 정보통신부정책관,서해엽 환경부사무관,서규식 코멕스카본사장,서병선 한동대교수,서원철 미국듀폰대교수,서찬식 건양대교수,서병기 배제대교수,서수한 대구대 교수,서순식 춘천교대교수,서영식 충남대교수,서원석 미국펜실베니아연구교수,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원장.행복한아이연구소장,서흔수 화이자제약,서병화미국일리노이대학교연구원, 인권운동가 서승, 서준식, 서경식 , 서윤기 서울시의원, 서주선 서화가, 서인석 시인, 서정윤 시인, 서정인 소설가, 서영은 소설가, 서용달 모모야마가쿠인대 교수,오케스트라 지휘자 서훈, 지휘자 서희태, 국가정보원원장 서훈, 국가정보원 차장 서동구,청와대 사이버안보비서관 서상훈,국세청차장 서대원, 청와대 정보분석비서관 서용석 등 인물이 있다.

한국 현대사(韓國現代史)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동학지도자: 2명, 독립군 총재: 1명,항일의병장: 1명,독립운동가: 150명, 사진선구자: 1명, 대통령후보:1명, 정당대표: 2명, 국무총리급: 1명,국회부의장: 1명,국회의원: 9명, 그룹총수(회장): 3명, 장관:5명, 차관:3명, 종교지도자: 2명, 대학자:11명,시장: 1명, 군수: 2명, 세계적인 예술가: 2명, 연예인:6명, 운동선수:7명, 장군:6명, 역전의 용사:5명이다.

서(徐)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93,954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3위이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과 기자조선 후손설,백제왕족의 후예설 등이 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예국 군장 여수기 후손설편집

고조선 시대에 예국(穢國)의 군장(君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뒤 아들들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며 백성들에게 공적을 쌓았다. 이에 백성들이 “중민(衆民)을 도와 공이 많다”는 뜻에서 여(余)씨 성에 두인변(彳 : 두 사람, 즉 여러 사람이라는 의미)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남방계 오음(吳音)으로 여(余)는 Yi*Ya*To 와 더불어 서(徐) Su로도 읽힌다. <대어대자전臺語大字典>. 서국(徐國)는 단군 조선(檀君朝鮮)의 제후국이며 동이(东夷)이다. 고대 중국은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서융(徐戎) 혹은 서방(徐方) 즉 동이집단(東夷集團)이라 부른다.서언왕(徐偃王)의 나라인데 대서제국(大徐帝國) 바로 대서황제국(大徐皇帝國)이라 부른다.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서언왕(徐偃王)이 동이(東夷)의 맹주가 되었고 이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단군 조선 21세 단군(檀君) 소태(蘇台)와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은나라 쇠퇴하였다.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 서이족(徐夷族)의 지도자인 서언왕(徐偃王)은 중원 대륙에 진출한 동이족(東夷族)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목왕이 서이(徐夷)가 두려워 서언왕(徐偃王)을 동이(東夷)세력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며 서국(徐國)의 제후국이 36개나 된다. 서우여(徐于餘, 혹은 西余)는 번한조선(番韓朝鮮) 왕(王)으로 임명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서우여(徐于餘) 원손이 서국(徐國)에 서구왕(徐駒王=徐驹王)과 서언왕(徐偃王)이다. 부여(扶餘(余))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余)氏).부여씨(扶餘(余)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余))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余)氏).여씨(餘(余)氏)로 사용하였고, 신라(新羅)왕조(王朝)에는 서나(徐那:徐那伐)·서야(徐耶:徐耶伐)·서라(徐羅:徐羅伐)·서벌(徐伐) 등 사용하여 서이족(徐夷族) 흔적이 남아있다. 서복(徐福)은 진한(辰韓)으로 진출해 신라 건국의 효시가 되는 사로국(=서라벌·徐羅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신라와 서복(徐福)의 동도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 후손 혹은 서복(徐福) 후손이고, 또한 부여족(扶餘(余)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利川徐氏敎理公派譜》 卷之70.서씨득성연원록">利川徐氏敎理公派譜編纂委員會, 1989,《徐氏得姓淵源錄》

《서주지리지(徐州地理志)》에는 서언왕(徐偃王)의 기사(奇事)를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즉, "서군(徐君)의 궁인(宮人)이 임신을 하여 계란 하나를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여겨 물가에다 내다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는 곡창(鵠倉)이라고 부르는 한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물가에서 포획물을 찾다가 이 계란이 눈에 띄자 그것을 입에 물고 집에 돌아왔다. 고독모는 이 물건이 매우 진기한다고 느껴 그것을 덮어서 보온해 주었더니 이윽고 한 아이로 변하였다. 태어났을 때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하여 이름을 언(偃)이라고 하였다. 서군(徐君)은 궁중에서 이 소식을 듣고 또 그 아이를 받아드렸다. 그 아이는 장성한 뒤에 총명(聰明)하면서도 또 인후(仁厚)한지라 서국(徐國)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뒤 곡창이 임종시에 머리에 뿔이 나고 9홉의 꼬리가 생겼는데 원래 그 개은 황룡(黃龍)이었다. 서언왕(徐偃王)은 그 개를 서나라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지금도 이 개무덤을 볼 수 있다. 서언왕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인의(仁義)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배를 타고 상국(上國)으로 갈 생각을 하고 이윽고 진채(陳蔡) 일대에서 수로를 개통하였는데 도랑을 파다가 불은색의 화살을 얻었다. 이는 상천(上天)의 상서로운 징조로 생각하고 바로 이로써 자기 이름의 호로 취하고 서언왕(徐偃王)을 자칭하자,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모두 그에게 의부하였다. 주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사자를 초(楚)나라에 보내어 초나라에 명하여 군사를 내어 토벌하라고 하였다. 서언왕(徐偃王)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여 백성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라고 하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자락으로 달아났는데 백성들이 그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으며 산위에 석실묘를 만들었는데 매우 영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서 기도하였다. 문자의 기록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과 서로 검증이 되어 서로 부합된 곳이 있는 듯하지만 시대가 까마득하여 이미 고증하기가 매우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 서성 (徐城) 밖에 서군(徐君)의 묘가 있다. 종전에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이 묘 앞에서 차고 있는 칼을 풀어 놓았다고 하는데, 이른바 마음속으로 이미 답응한 일이 결코 위배되지 않았다."(역도원 저·진교역 등 역주, 《수경주전역(水經注全譯)》(상), 귀주인민출판사, 206쪽 참조)

서복(徐福): 서귀포(西歸浦)에 전해오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 한라산〔漢拏山〕)을 찾아 항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徐市)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徐市)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기자조선의 후손설편집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대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 단군(檀君)을 기점으로 번조선(番朝鮮)은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불리우게 된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BC 1285 ∼ BC 1225)는 번한조선(番韓朝鮮) 고죽군(孤竹君)1세가 되었다. 우현왕이었던 高씨 색불루 단군(檀君)이 소태 단군(檀君)으로부터 선양받아 단군 조선(檀君朝鮮)으로 국호를 바꾸고, 소태 단군의 종실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를 번한(番韓)에, 웅족의 후손인 여(黎)씨를 마한에 봉하였다. 색불루 태왕은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의 40대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신라(新羅)의 국호는 서라(徐羅)가 설아벌(새벌)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서신일의 묘역이 있는 장소는 성(城)을 새로 쌓았다는 뜻에서 설아성이라 부르던 것을 서아성(徐阿城)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 첫 글자인 서(徐)씨라 칭했다는 설이다.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중국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왕조 가운데 하(夏)나라는 화하족과 동이족이 교대로 지배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황하 하류에서 일어난 은(殷)나라는 고고학상으로 볼 때, 동이족이 지배권을 장악한 시대다.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황하의 지류인 위수(渭水)에서 주나라가 등장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다. 은나라가 주나라에 멸망하자 은나라 지배층의 일부는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었다.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수유국(須臾國)은 기자 조선(奇子朝鮮)의 나라이다. 단군(檀君) 즉위 쟁탈전에서 색불루에게 패하고 반항하다가 결국 번조선(番朝鮮)의 단군(檀君)으로 임명받은 수유국(須臾國)(번조선(番朝鮮) 제후국)의 서우여(徐于餘,서여西余)도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즉위하자 번조선(番朝鮮)을 '태양의 아들(기자奇子)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기자조선(奇子朝鮮)'으로 바꾸고 단군(檀君)을 천왕이라 칭하게 했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의 서숙으로 번조선(番朝鮮)의 제후국가인 수유족(須臾國)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망명을 할 때 은나라의 수유족(須臾國)도 번조선(番朝鮮) 땅으로 많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망명한 수유족(須臾國)을 기자(箕子)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망명한 기자(箕子) 족이 후에 강성해져서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략했을 때 기(箕)후라는 사람이 5천의 군대로 몰아 내고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에 올랐기 때문이다. 239 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수유국(須臾國)의 제후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 단군(檀君)으로 삼고 자신은 천왕랑이라 칭하며 부여(扶餘(余)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箕)후부터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준(箕準)까지가 번조선(番朝鮮)(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이다. 수유족(須臾國)(기자(箕子)족)의 성씨로는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있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馬韓)(마조선(馬朝鮮)지역인 해머리땅으로 들어 온 기준(箕準)의 후손들이 바로 서씨(徐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다.

기자조선의 영역


동이(东夷)족의 지도자로는 태호씨(太皞氏)와 소호씨(小皞氏)가 있었다. 양자강 중하류와 그 이남 지역에는 종족의 기원이 다른 여러 종족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구려족(九黎族)은 최초로 중원 지역에 진입하였던 가장 강력한 종족으로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지도자였다. 소호금천(小昊金天)의 자손나라가 있는데 산동성 담(譚)지역이며 후손의 성이 영(嬴)이고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에 여수(女脩)란 여자가 제비 알을 삼키고 <대업(大業) 혹 고요(皐陶)>을 낳고 이이가 동이족의 후손인 소전(小典)의 자손을 아내로 맞아 여화(女華) 아들을 낳으니 대비(大費) 혹 백익(伯益-백의)이다. 창의(昌意)의 아들 전욱고양(顓頊高陽)의 4남 여목(余目)[또는 사방책봉(四方冊封)]이다. 여목 씨가 넷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토템인 돼지는 유달리 숫자 ‘4’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예를 들면 돼지를 뜻하는 ‘시(豕)’는 4월을 뜻하고 4월은 또 ‘여월(余月)’ 이라고 한다.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에서 ‘시(豕)’는 숫자 ‘4’를 뜻하고 태양족인 까닭에 돼지를 ‘해(亥)’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올리며 역사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4’를 ‘사(死)’와 관련지어 ‘재수 없다’ 또는 ‘죽음’을 뜻한다하여 기피하는 까닭도 사방책봉의 아들로 고조선(古朝鮮)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백익(伯益-백의. 산해경(山海經) 저자)이 우임금의 아들인 하계(夏啓)로부터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백익(伯益)은 대렴(大廉 -진(秦) 진시황제) · 조(趙)씨의 조상)과 약목(若木 -서(徐) · 황(黃) · 마(馬)씨의 조상) 두 아들을 낳았다. ​백익(伯益)의 후예로서, 영성(嬴姓) 14성씨(姓氏)는 서(徐), 조(趙), 황(黃), 마(馬), 양(梁), 종(鍾), 진(秦), 강(江), 갈(葛), 비(費), 구(瞿), 곡(谷), 렴(廉), 무(繆)이다. 후손인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번한성(番韓)으로는 그 동북쪽이면서 금주시 서쪽인 대집둔(台集屯) 서가구(徐家溝)로 비정된다. 중국에서 현재 요서군 도하, 대극성 등으로 보는 곳인데 이는 틀린 것이고 전한의 도하, 대극성은 앞에 애기한 홍애자 고성이다. 대신에 이곳은 황수 黃水 위에 있던 험독성이다. 요동속국이었다가 전연국의 모용외에게 들어갔고 모용황의 등극 과정에 나온다. 대집둔 서가구(徐家溝) 출토품으로는 번한서인(番○徐印)이라 새겨진 은제銀製 도장이 있고, 채도문 도기와 용문龍文 동모銅矛가 나왔다. 동모銅矛는 보통 전국시대 유행하였다. 대집둔에는 서가구성과 남쪽의 반장자성, 즉 번한성, 동쪽의 장령구성이 있다. 이곳이 서우여 기자(徐于餘奇子)의 번한 험독성으로 고려된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 번한성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은 지금 여라하(汝羅河)라고 하는데 고대 황수이기도 했고 또한 당태종의 30만 대군이 고생한 요택(遼澤)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금주시 바로 밑, 번한성의 동쪽까지 바다가 들어왔을 것으로 고려된다. [요사]에서는 험독險瀆을 비리군지陴離郡地라고도 하였다. 본래 서우여기자국(徐于餘奇子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거의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의 영역이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지석묘,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그리고 단군(檀君)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색불루의 후단군(檀君) 조선은 고리국이 있던 창무시의 막주, 즉 막한과 철령시 이북의 평양성, 녹산(鹿山王朝) 아사달, 장당경, 그리고 서압록과 오지인 길림을 가졌다. 요동에서 살수 이남은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영역이었다.

백제왕족의 후예설편집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여동생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정조대왕의 서씨에 대한 견해편집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 한(漢) 나라에는 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있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그리고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말하자, 당시 각신(閣臣)인 서유방(徐有防), 서정수(徐鼎修), 서용보(徐龍輔), 서영보(徐榮輔)와 사관 서유문(徐有聞)이 연석에 있었는데 함께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였다. (姓徐者顯達。莫如我國。漢有徐穉,徐庶。吳有徐盛。而南宋之徐煕,徐道,徐度,徐叔嚮,徐仲融,徐文伯,徐嗣伯。北齊之徐之才,徐林卿,徐同卿。元魏之徐謇,徐雄。隋之徐敏齊者流。皆以名醫聞於後。今之姓徐而致位於隆顯者。若有醫國之才則甚善。時閣臣徐有防,徐鼎修,徐龍輔,徐榮輔,史官徐有聞登筵。竝起而拜謝。)

위의 기록은 정조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은 참으로 황당한 기록 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합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합니다. 위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한 기록을 빼고 "지금 서씨 성을 가지고 현달한 지위에 오른 사람이 만약 나라를 치료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좋겠다."라고 한다면 참으로 막연한 기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 임금이 말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은 조선의 상대(上代)의 인물들이며 역사였던 것입니다.

서씨 분파(徐氏分派)편집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상서우복야.정2품)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서씨(利川徐氏), 달성서씨(達城徐氏), 부여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본관의 유래편집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문하시중. 종1품)으로 봉했다.

본관 연혁편집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 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고려 인종은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고종 때는 영창(永昌)이라 불렀으며 공양왕은 조비 신씨(祖妣 申氏)의 고향이라 해서 남천군(南川君)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에 이르러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44년 조선 세종(26년)에 이르러 호수(戶數)가 1000호 이상이 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613년(광해군 5년) 현으로 강등됐고, 1623년(인조 1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돼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에 이천시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일곱 성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분파(分派)편집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9세손 휘린(諱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6세손 휘연(諱演) 강호공파(江湖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휘념(諱恬) 문한공파(文翰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휘선(諱選) 공도공파(恭度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공도공(恭度公) 서선(徐選) 10세손 휘기(諱起) 문목공파(文穆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휘윤(諱玧) 시랑공파(侍郞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휘보(諱輔) 전서공파(典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3세손 휘호(諱皞) 사인공파(舍人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현손(玄孫) 휘광(諱珖) 예빈공파(禮賓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증손(曾孫) 휘익(諱翼) 부령공파(副令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휘학종(諱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휘첨(諱詹) 소윤공파(少尹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휘릉(諱稜) 절효공파(節孝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휘릉(諱稜) 후손 휘영우((諱永佑) 목사공파(節孝公後牧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2세손 휘눌(諱訥) 원숙공파(元肅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유(諱愈) 양경공파(良景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척(諱陟) 창사공파(倉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휘진(諱晉) 교리공파(校理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교리공(校理公) 서진(徐晉) 후손 휘인원(諱仁元) 명암공파(嗚嚴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휘신(諱信) 목사공파(牧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휘유(諱逾) 비인공파(庇仁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직장공파 (直長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사직공파 (司直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부사공파(府使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서공파(判書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평장공파(平章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현령공파(縣令公派)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윤공파(判尹公派)

시조편집

이천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 817~902년)은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 부총리)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그의 생애 동안 헌덕왕에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신이 난무했다.

그는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한천(漢川 : 지금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孝養山) 아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효양거사라 칭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니, 제자들이 몰려와 집 안팎으로 가득찼다.

서신일은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에 제자들이 “저희 가운데 스승님의 대를 잇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면 훗날 스승님의 묘(廟)를 누구에게 의탁하겠습니까. 다시 부인을 얻으시어 아들을 얻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청하여 그는 아내를 다시 얻었다. 어느 봄날 서신일이 노비들을 거느리고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에 꽂힌 사슴 한 마리가 불쑥 그의 앞으로 뛰어와 쓰러졌다. 서신일은 화살을 뽑고 약을 바른 다음 멍석 아래 사슴을 숨겼다.

곧이어 사냥꾼이 나타나 사슴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서신일은 “사냥꾼인 당신을 두려워하여 도망쳤을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사슴이 왔겠소?”라며 사냥꾼을 돌려보냈다. 덕분에 사슴은 사냥꾼의 눈을 피했고, 상처를 치유받아 숲으로 되돌아갔다.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낮에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宰相)에 올라 영달(榮達)을 누리도록 도우리라.”

그 일이 있은 뒤 서신일이 나이 85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내의령은 내의성(내사성과 문하성을 합친 최고의 중앙기관)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수상격에 해당한다. 서필의 아들이 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다. 서희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의 땅을 회복한 장군이자 문신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사하니 지금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마을 뒤의 효양산 산록에 있는 시조 서신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가족관계편집

•부인 : 합천 홍씨(陜川 洪氏) - 아버지는 홍찬(洪贊) ◦아들 : 서필(徐弼 내의령.종1품.국무총리)

◦며느리 : 평양 황씨(平壤 黃氏) ◾첫째 아들 : 서염(徐廉)

◾둘째 아들 : 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첫째 손자 : 서눌(徐訥 문하시중.종1품.국무총리)

◾둘째 손자 : 서유걸(徐惟傑 좌복야.정2품.부총리)

◾셋째 손자 :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3품.장관급)

◾넷째 손자 : 서주행(徐周行 달성군)

◾셋째 아들 : 서영(徐英)

◾동생 : 서신통(徐新通) ◾동생의 아들 : 서목(徐穆 문하시중.종1품. 국무총리)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편집

•현종비 원목왕후


인물편집

•서희(徐熙, 942~998년)는 고려의 외교관이자 문신, 군인이다.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등용됐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돼 귀국했다. 성종 12년(993년) 거란(契丹)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지만 서희는 이에 극력히 반대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이 결과 고려는 거란과 싸우지 않고도 그들을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 곧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를 포함한 강동6주의 영토를 수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숨을 거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 덕종 때 태사(太師)가 추증(追贈)됐다. •서일(徐一, 1881~1921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우리정부는 서일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여수기편집

생몰년 미상. 단군시대의 예국군장(濊國君長). 성은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이다. 예국 땅은 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 왕 즉 부여(扶餘) 지역이다.

9명의 아들이 여러 군을 나누어 다스려 백성들에게 공이 있고, 백성들이 따르자 서씨 (徐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천 서씨와 관계

여수기 (餘守己)군장은 서씨(徐氏)에 조상이며 멀게는 서국(徐國)에 서구왕 (徐九王)와 서언왕 (徐偃王), 그리고 방사 서복(徐福)의 선조다. 또한 단군조선(檀君朝鮮)-부여(扶餘)- 백제(百濟)- 고려(高麗)에 서씨(徐氏) 역사이다.

부여씨 관련편집

여수기(餘守己) 군장에 후예로 부여 (扶餘) 혹은 여 (餘)왕족의 성씨. 현재는 소실되었다. 고구려왕족과 백제왕족이 부여씨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하고. 고려시대에는 서씨(徐氏)가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를 계승한다.

이천 서씨와의 관계

여수기 군장이 서씨에 시조이고, 부여씨에 원조이므로 중화 서씨(中華徐氏) 서언왕(徐偃王)후예와 한국서씨(韓國徐氏) 서신일(徐神逸) 후예는 동성동본이다. 서신일 후예는 이천 서씨,달성 서씨,대구 서씨,연산 서씨,부여 서씨,장성 서씨,전주 서씨,남양 서씨,당성 서씨 등이다.

이천 서씨(利川 徐氏) 가볼만한 곳편집

이천 서희 역사관 서희 테마파크[[1]]

이천 효양산 전설문화 축제[[2]]

이천 이섭대천 기념비[[3]]

이천 서신일 시조 묘소[[4]]

이천 서희선생 추모제[[5]]

이천 설봉 서원. 서희선생[[6]]

이천 설봉 공원.서희선생[[7]]

여주 서필선생 묘소[[8]]

여주 서희선생 묘소[[9]]

안산 잿머리 성황당[[10]]

광명 충현서원[[11]]

고양시 덕양구 이축선생부인 이천서씨 묘[[12]]

파주 고려 통일대전[[13]]

파주 서성환선생 묘소[[14]]

연천 숭의전[[15]]

포천 양경공파 문중[[16]]

구리 망우리 묘지 -서광조선생[[17]]

구리 망우리 묘지 - 서동일선생[[18]]

가평 교리공파 종회[[19]]

의왕시 서견선생 묘소[[20]]

서대문구 홍은동 대종교 총본사. 서일선생[[21]]

외교안보연구원 서희선생 흉상[[22]]

용산 전쟁 기념관 서희선생 흉상[[23]]

용산 이천서씨 대종회[[24]]

동작동 현충원- 서일선생[[25]]

횡성 서득천.서진영부자 효자각[[26]]

춘천 명암공파 종회[[27]]

광양 원숙공파 종회

광양 옥룡면 옥평사[[28]]

순천 방원공룡박물관[[29]]

화순 부양정. 삼산정[[30]]

화순 성산사[[31]]

화순 서상룡선생 [[32]]

나주 철천사[[33]]

나주 서상록선생 묘소[[34]]

나주 만호정[[35]]

나주 병부상서공 종가[[36]]

나주 철천리[[37]]

나주 용강사지[[38]]

나주 다시 서효환선생 묘[[39]]

함평 봉산대첩 화승비峰山大捷 話勝碑[[40]]

함평 와촌[[41]]

함평 동강사[[42]]

함평 영사재[[43]]

무안 강호문중 영사재[[44]]

무안 월산사[[45]]

무안 모사재

무안 석송 목장

완도군 애국지사 서재만선생 [[46]]

신안 서태석선생 묘소[[47]]

장성 용전사[[48]]

장성 서능선생 정려비[[49]]

김제 독립운동가 서정천선생[[50]]

고창군 독립운동가 서종채 선생 생가

순창 화남사[[51]]

공주 서기선생 묘소[[52]]

공주 충현서원[[53]]

경주 귀산서원[[54]]

경주 양경공 종가(효우당)[[55]]

안동 이천서씨 열녀비[[56]]

김천 섬계서원

중국편집

중국의 서(徐, 병음 : Xu)씨는 중국에서 성씨 순위 10위이다.인구수는 대략 2,000만명이다. 기원전 2세기 제나라 출신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고조선[古朝鮮] 창의(昌意) 계통인 소호(少昊), 고도(皋陶)、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을 원시조로 한다. 약목의 후손 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과 32세 [서언왕(徐偃王)- 동이족(東夷族).한국사람]이 유명하다.서언왕은 중원대륙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와 서서(徐庶)가 유명하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남송(南宋)의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과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과 원위(元魏)의 서건(徐謇), 서웅(徐雄)과 수 나라의 서민제(徐敏齊) 등은 모두 명의(名醫)로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서황(徐晃),서개(徐蓋),서패(徐覇),서상(徐詳),서원(徐原),서원(徐元),서간(徐幹),서질(徐質),서혁(徐奕),서막(徐邈),서곤(徐琨),서성(徐盛),서소(徐韶),서윤(徐胤),서봉(徐奉),서구(徐璆),서영(徐栄),서훈(徐勛),서화(徐和),서타(徐他),서수(徐隨)가 있다.


서재원(徐載源): 1965년생. 한양대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MBA. 대신증권. 대신경제연구소. 새정치국민회의. 삼성물산. TYCO GROUP. 코스닥 보안업체 본부장